레이 가와쿠보가 색으로 돌아온 날
꼼데가르송의 2027년 봄여름 컬렉션이 파리에서 공개되면서, 레이 가와쿠보는 불과 한 시즌 전 스스로 "검정이야말로 나를 위한 색"이라고 선언했던 태도를 뒤집고 다시 색채의 세계로 돌아왔다. 지난 가을겨울 시즌 그녀는 20개의 룩을 전부 검은색으로만 구성하며 검정을 "저항과 정의, 독립의 색"이라고 규정했고, 이 발언은 패션 매거진 데이즈드와의 커버 인터뷰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됐을 만큼 당시 컬렉션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번 시즌 쇼노트에는 "왕실의 삶과 일상의 삶이 하나가 될 때"라는 한 줄만 남기고, 진홍색 폴카도트와 코발트블루, 색 바랜 듯한 초록, 머스터드 옐로가 뒤섞인 조각적인 룩들을 무대에 올렸다. 꼼데가르송처럼 한 시즌의 색채 선언을 다음 시즌에 정면으로 뒤집는 브랜드는 드물고, 그 전환 자체가 지금 패션 업계가 주목하는 신호다. 스스로 세운 색채의 규칙을 바로 다음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깨버리는 전개는 파리 패션위크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장면이며, 그래서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이번 시즌이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라, 다음 분기 패션 시장 전체의 색채와 장식 방향을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로 읽히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이전 시즌과 비교하면 변화의 폭이 분명하다. AW26이 검정이라는 단 하나의 색으로 20개 룩을 밀어붙인 극단적 미니멀리즘이었다면, SS27은 색채와 소재, 신체 구조까지 동시에 흔드는 맥시멀리즘으로 완전히 선회했다. 거칠게 재단된 데님과 플라스틱 질감의 브로케이드가 조각조각 이어붙인 재킷 사이로 삐져나오고, 핀스트라이프 원단은 베개처럼 부풀어 오른 세퍼레이츠로 재구성되며 격식 있는 소재를 캐주얼한 볼륨으로 뒤집는다. 여기에 프랑스 명장 칭호(메이외르 우브리에 드 프랑스) 수상 경력의 일본인 밀리너 노부키 히즈메가 디자인한 탑처럼 솟은 왕관형 헤드피스가 더해지면서, 룩 전체가 왕실의 상징을 입은 채 일상복의 태도를 취하는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신체를 다루는 방식 역시 파격적이다. 튜브 형태 가운 뒤로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펼쳐지고, XXL 크기로 부풀린 흉곽 뒤에 원단이 구겨져 들어가며, 드레스는 기타와 바이올린을 연상시키는 실루엣으로 신체를 재단하고, 투명한 코르셋은 어깨를 늘이거나 구부려 인체 비례 자체를 다시 그린다. 왕관을 쓴 몸이 동시에 악기처럼 비틀리는 이 대비가 이번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장치다. 보통 왕관이나 왕실 이미지는 엄숙하고 값비싼 소재로 완성되는 것이 관례지만, 이번 컬렉션은 그 상징을 거친 데님과 베갯속처럼 부푼 핀스트라이프 같은 일상적인 재료 위에 얹어, 격식과 평상복의 위계 자체를 뒤섞어 버렸다는 점에서 기존 럭셔리 문법과 뚜렷하게 갈라진다.
왜 지금인가
꼼데가르송이 검정에서 색채로, 미니멀에서 맥시멀로 방향을 트는 시점은 우연이 아니다. 패션 업계 전반이 지난 몇 시즌간 조용한 럭셔리로 불리는 무채색·저톤 미니멀리즘에 집중해 온 흐름 속에서, 이 같은 색채와 장식의 과잉은 상대적으로 더 도드라져 보인다. 꼼데가르송은 1980년대 이른바 블랙 쇼크 이후 검정을 지적 반란의 유니폼처럼 써온 브랜드로 각인돼 있고, 그렇기에 검정을 버리고 색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업계 안팎에 던지는 메시지가 작다고 보기 어렵다. 왕실과 일상을 하나로 묶는다는 쇼노트의 문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데, 이는 럭셔리 패션이 오랫동안 기대온 신분적 상징과 평상복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산업 전반의 감각과 맞물린다. 격식과 일상이 뒤섞이는 흐름은 스트리트웨어와 하이패션의 경계가 무너진 지난 10년의 연장선이기도 하며, 가와쿠보가 그 흐름의 극단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브랜드들이 다음 시즌 어디까지 색과 장식, 왕족적 상징을 끌어올지 가늠하는 기준점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파리 패션위크의 타 하우스들이 이번 시즌 어떤 색채 전략을 들고 나오는지와 나란히 놓고 봐야 할 이유다. 소비자 쪽에서 보면 몇 해째 이어진 무채색 중심의 '조용한 럭셔리' 피로감이 누적된 시점이기도 해서, 꼼데가르송처럼 영향력 있는 하우스가 색과 장식을 과감하게 꺼내 드는 선택은 다른 브랜드들에게도 색채로 돌아설 명분을 만들어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다음에 볼 것
이번 컬렉션이 실제 매장에 어떤 형태로 풀릴지, 왕관형 헤드피스처럼 과장된 아이템이 쇼 피스로만 남을지 커머셜 라인으로 축소돼 판매될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꼼데가르송은 통상 쇼 시즌 이후 수개월이 지나 룩북과 홀세일 라인업을 통해 실제 판매 범위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과장된 실루엣 중 어느 선까지가 상업적으로 축소될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 또한 노부키 히즈메의 헤드피스가 이번 시즌을 넘어 브랜드의 시그니처 협업으로 이어질지도 지켜볼 지점이다. 밀리너와의 협업은 꼼데가르송에게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왕관이라는 상징을 전면에 세운 선택이 다음 시즌에도 이어진다면 이는 일회성 콘셉트가 아니라 브랜드가 바라보는 다음 방향의 예고편으로 읽힌다. 가와쿠보가 한 시즌 만에 검정에서 색으로 돌아선 전례가 있는 만큼, 다음 시즌 다시 색을 걷어내고 검정으로 회귀할지, 혹은 이번 색채 실험을 더 밀어붙일지도 업계가 주시할 변수다. 파리 패션위크 내 다른 하우스들의 색채·장식 전략과 겹쳐 보면, 이번 시즌이 미니멀에서 맥시멀로 흐름이 넘어가는 변곡점인지 아닌지가 다음 몇 시즌 안에 드러날 것이다. 쇼 피스 특유의 과장된 비례가 실제 홀세일 가격표에서 어떻게 조정되는지, 왕관형 헤드피스가 액세서리 라인으로 따로 분리돼 판매되는지도 가격 공개 시점에 함께 확인해볼 만한 디테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