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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Hands On·6 min read·2026.09.29

페라가모 2027 S/S, 벨트와 포켓을 다시 쓰다

첫 흑인 디렉터가 되살린 실용의 상징

JIWOOTRENDFEED DESK

첫 흑인 디렉터가 되살린 실용의 상징

이탈리아 럭셔리 하우스 페라가모가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2027년 봄여름 컬렉션을 공개하며, 95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오른 맥시밀리안 데이비스가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다시 짜는 작업을 3년째 이어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이번 시즌 그는 그동안 실용적 기능을 상징해 온 벨트를 순수한 장식 요소로 전환하고, 자켓과 스커트, 드레스, 수트, 바지 곳곳에 포켓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옷의 쓸모 자체를 재정의했다. 1940년대 여성들이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던 해방의 감각과,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리 밀러 사진전이 보여준 모험적 여성상, 그리고 이집트 사막의 풍광까지 끌어와 컬렉션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엮은 점도 눈에 띈다. 창립자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스타들의 신발을 맞춤 제작하며 시작한 브랜드가 9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전혀 다른 세대의 디렉터 손에서 어떻게 다시 읽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이번 발표는 단순한 신작 공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유서 깊은 이탈리아 하우스가 헤리티지를 지키는 동시에 세대교체 요구에도 응답해야 하는 지금, 이 컬렉션은 그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보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무엇이 달라졌나

가장 뚜렷한 변화는 기능과 장식의 자리바꿈이다. 페라가모는 원래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스타들의 신발을 맞춤 제작하며 시작된 브랜드로, 벨트나 포켓 같은 요소는 오랫동안 실용을 보완하는 디테일로만 다뤄졌다. 이번 컬렉션에서 벨트는 허리를 조이는 기능 대신 실루엣을 완성하는 오브제로 다뤄졌고, 포켓은 감추는 대신 자켓과 스커트, 드레스, 수트, 바지 전반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며 하나의 디자인 언어로 격상됐다. 상징적인 아카이브 코드도 함께 소환됐다. 1947년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처음 고안한 F 웨지가 새로운 버전으로 되살아났고, 브랜드의 시그니처였던 바라 펌프도 다시 해석돼 등장했다. 여기에 페이유 원단에 자수를 놓은 가운, 속이 비치는 드레이프 드레스, 주름을 잡은 블라우스가 더해지며 과거의 실용적 상징과 현재의 여성적 우아함이 한 무대 위에서 만났다. 색감 역시 중립색을 기본 축으로 삼되 군데군데 생동감 있는 컬러를 배치해,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포인트가 분명한 팔레트를 완성했다. 이런 시도는 이번 시즌만의 일회성 실험이 아니다. 데이비스는 2022년 취임 이후 시즌을 거듭할수록 벨트, 포켓, 웨지, 펌프처럼 창업자 시절부터 내려온 상징들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서 무대에 올려 왔고, 이번 컬렉션은 그렇게 쌓아 온 자신만의 디자인 문법을 한층 더 정교하게 완성한 결과물에 가깝다.

왜 지금인가

이 컬렉션이 놓인 맥락을 보면 타이밍이 우연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데이비스는 런던 패션대학을 졸업한 뒤 2020년 자신의 이름을 건 레이블을 설립하고, 곧바로 LVMH 프라이즈 준결승까지 오른 신진 디자이너였다. 그런 그가 2022년 95년 전통의 페라가모에 흑인 디렉터로는 처음 발탁된 것 자체가, 유서 깊은 유럽 하우스들이 오랜 관성에서 벗어나 브랜드를 현대화할 인물을 외부에서, 그것도 아주 젊은 세대에서 데려오는 최근 럭셔리 업계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취임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벨트, 포켓, 웨지, 펌프처럼 창업자 살바토레 페라가모 시절부터 내려온 실용의 상징을 소재로 삼아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래된 헤리티지 하우스일수록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자기 브랜드의 아카이브에서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꺼낼 수 있는 상징을 찾아내는 편이 정체성 재구축에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성장 둔화를 겪고 있는 럭셔리 시장 전반에서, 브랜드마다 헤리티지를 어떻게 동시대적으로 번역하느냐가 소비자를 다시 끌어들이는 핵심 변수로 떠오른 시점과도 맞물린다. 특히 밀라노 패션위크라는, 이탈리아 헤리티지 하우스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방향성을 비교당하는 무대에서 이 컬렉션이 공개됐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동시대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과거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번역해내느냐를 두고, 경쟁 하우스들과 사실상 나란히 평가받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볼 것

이번 발표는 어디까지나 밀라노 패션위크 런웨이 공개 단계로, 실제 제품이 매장에 걸리는 시점은 통상적인 럭셔리 업계 관행대로 이후 몇 달의 시차를 두고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봄여름 컬렉션은 보통 발표 후 반년 안팎의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리테일에 풀리기 때문에, 벨트와 포켓을 전면에 내세운 이번 룩들이 실제로 어떤 가격대와 라인업으로 소비자 앞에 놓이는지가 다음으로 확인할 지점이다. 아울러 데이비스가 이번 시즌에도 반복해서 소환한 F 웨지와 바라 펌프 같은 아카이브 상징들이 향후 시즌에서도 계속 변주되며 페라가모의 시그니처 재해석 전략으로 굳어질지, 아니면 이번 한 시즌의 실험으로 그칠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특히 페라가모는 본래 신발과 가죽 제품으로 성장한 브랜드인 만큼, 런웨이의 웨지와 펌프가 실제 매장용 슈즈 라인으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는 브랜드 정체성과 직결되는 부분이라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더 넓게 보면 젊은 디렉터가 오래된 하우스의 창업 서사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이번 방식이 시장에서 통한다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다른 유럽 헤리티지 브랜드들도 같은 전략을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 컬렉션은 페라가모 한 곳의 시즌 화보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든 럭셔리 하우스들이 다음 세대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방법론의 시험대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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