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아니라 채권으로 움직인 탈탄소
H&M그룹이 공급망 탈탄소를 위해 운영해온 공동 금융 프로그램 '퓨처 서플라이어 이니셔티브(FSI)'의 운영 성적표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숫자로 드러났다. H&M을 포함한 7개 브랜드가 함께 참여해 현재 24개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고, 이 재원은 2025년 발행한 28억 스웨덴크로나(SEK 2.8B) 규모의 지속가능연계채권에서 나온다. 이 자금으로 기대하는 온실가스 감축량은 14만 6,939톤(tCO2e)에 이른다. 그동안 패션 브랜드들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 줄줄이 나열하던 탄소감축 '약속'은 대부분 목표연도와 퍼센트로만 표현돼 실제로 어떤 설비가 바뀌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번 공개는 그 약속이 실제 채권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으로 공급사 보일러를 바꾸는 단계까지 넘어갔다는 증거를 처음 수치로 보여준다. 한 브랜드가 혼자 감당하기엔 투자 회수 기간이 길고 수익성도 불확실한 설비투자를, 여러 브랜드가 신용과 리스크를 나눠 짊어지는 구조로 바꿔냈다는 점에서, 이번 발표는 홍보용 선언이 아니라 실제 자금 집행 보고서로 읽어야 한다. 패션업계의 자금이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무엇이 달라졌나
FSI의 핵심은 '공동 신용'이다. H&M 혼자 공급사에 저리 대출을 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7개 브랜드가 각자의 신용과 자금을 합쳐 공급사가 개별적으로는 받기 어려운 조건의 금융과 기술 지원을 패키지로 제공한다. 그 결과가 숫자로 드러난 대표 사례가 석탄 보일러 교체다. FSI가 지원한 공급사의 석탄 보일러는 118개에서 27개로 줄었다. 비율로 보면 넉 대 중 세 대가 사라진 셈이다. 패션 공급망에서 석탄 보일러는 염색과 가공 공정의 열원으로 가장 널리 쓰이면서도 탄소배출이 가장 집중되는 설비로 꼽혀왔다. 개별 공급사가 자기 돈으로 보일러를 바꾸기엔 투자금 회수에 수년씩 걸리고, 거래하던 브랜드가 바뀌면 투자 자체가 매몰비용이 될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공급사 입장에선 노후 설비를 알면서도 계속 쓰는 쪽이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FSI는 이 위험을 브랜드 쪽으로 옮겨 공급사가 설비 교체를 결정하기 쉽게 만든 구조다. 한 브랜드의 대출이 아니라 7개 브랜드가 묶인 공동 신용이기 때문에, 공급사 입장에서는 특정 브랜드와의 거래가 끊겨도 투자금이 통째로 날아가는 위험이 줄어든다. 적용 지역은 방글라데시와 인도부터 시작했는데, 두 나라는 H&M을 비롯한 글로벌 브랜드들의 의류 생산 비중이 가장 높으면서도 노후 설비 의존도가 큰 지역으로 꼽힌다.
왜 지금인가
패션 브랜드의 온실가스 배출에서 실제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쪽은 매장이나 물류가 아니라 원단 생산과 봉제를 담당하는 공급망, 즉 스코프3(Scope 3)다. 브랜드 본사와 매장의 배출량을 모두 합쳐도 공급망 배출량에 비하면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2020년대 들어 투자자와 규제 기관이 브랜드 자체 배출량보다 공급망 배출량을 더 날카롭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브랜드들은 "우리 매장은 재생에너지로 돌린다"는 식의 선언만으로는 설명이 끝나지 않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공급사 설비투자가 회수 기간이 길고 기술 검증도 충분치 않은 경우가 많아, 은행권의 일반 대출만으로는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점이다. 브랜드 혼자 보증을 서기엔 신용 부담이 크고, 공급사가 혼자 조달하기엔 금리가 비싸다. 기존에는 이 틈을 브랜드별 기부성 지원금이나 소규모 보조 프로그램이 메웠지만, 그런 방식은 규모가 작고 지속성이 떨어졌다. 반면 채권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끌어오는 방식은 금액 자체가 다르고, 상환 구조가 있다는 점에서 일회성 지원과 성격이 다르다. 브랜드들이 손을 잡고 이런 방식을 쓰는 사례가 최근 몇 년 사이 늘었고, FSI는 그 흐름 위에 있다. 공급사 한 곳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설비 전환 속도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개별 브랜드의 단발성 캠페인과는 접근 자체가 다르다.
다음에 볼 것
지금 FSI가 지원하는 24개 프로젝트는 H&M의 공급사 약 2,000곳 가운데 1%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즉 이번 공개는 '완성된 성과'가 아니라 '검증 단계를 지나 확장을 앞둔 모델'로 읽는 쪽이 정확하다.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방글라데시와 인도에서 쌓은 보일러 교체 사례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같은 다른 생산 거점으로 얼마나 빠르게 번지느냐다. 둘째는 7개 브랜드로 시작한 연합에 다른 브랜드가 추가로 합류해 공동 신용의 규모 자체가 더 커지느냐다. 공급망 금융이 몇몇 선도 브랜드의 실험을 넘어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자체 신용만으로는 공급사를 지원하기 어려웠던 중소 브랜드들도 비슷한 연합형 구조를 설계할 명분을 얻게 된다. 반대로 확장이 더디다면, 이번 발표는 '파일럿은 성공했지만 규모화는 못 한' 사례로 남을 위험도 있다. 다음 분기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서 프로젝트 수와 지역 범위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참여 브랜드 수가 7개에서 몇 개로 늘어나는지, 그리고 추가 채권 발행 여부가 이 금융 모델의 성패를 가를 1차 지표들이다. 지금의 1% 미만이라는 숫자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손대지 않은 99%가 다음 자금 조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 뜻으로 읽는 쪽이 맞다.


